조앤 올스턴 서덜랜드 Dame Joan Alston Sutherland
(오스트레일리아, 1926년 11월 7일 ~ 2010년 10월 10일)
지금이야 고클에서 신처럼 추앙받고 있는 조앤 서덜랜드지만, 내가 기억하는 1980년대의 클래식계(FM 93.1MHz 라디오 채널 기준)에서는 ‘조안 서덜란드를 까는’ 기류가 분명히 있었다. 주로 그 ‘괴물같은’ 성량과 완벽한 테크닉에 비해 감정적인 표현이 약하다는 레파토리였다.
모노 라디오로 93.1Mhz를 듣던 중고딩 시절, 나는 조안 서덜랜드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그 특유의 '괴물같은' 성량과 테크닉에 감동받기보다는 어떤 다른 것을 더 느끼길 원했기 때문이다. 캐서린 배틀이나 키리 테 카나와, 바바라 핸드릭스나 안나 모포 같은 훌륭한 소프라노가 많았기 때문에 그닥 아쉽진 않았고, 실은 난 그 시절에는 소프라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성악 발성 특유의 (그 크헉~ 시동거는) 부담스러운 소리가 싫었고 테너나 바리톤 같은 남자들의 노래가 나았다. 플라시도 도밍고를 가장 좋아했다.(아.. 그 마음을 계속 지닐 수 없다니ㅜ;;) 찬란한 햇살을 밖에 두고 어두운 방구석에 앉은 애늙은이가 베토벤도 말러도 다 싫어, 바흐를 비롯한 바로크 기악의 한없이 투명한 소리에 탐닉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조안 서덜랜드에 대한 두 가지 좋은 기억이 있어서 우호적인 감정이 있었다.
한번은 해설자가 조안 서덜랜드의 한국공연을 해설하면서 조안 서덜랜드가 전성기 때에는 감성적인 표현이 좀 부족했었는데, 전성기가 지난 후에야 그 듣는 이에게 벅찬 감동을 주는 영역에 도달한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쩌면 아쉬운 이야기였겠지만, 또 어찌 보면 따스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생각나는 또 다른 한 가지는 어느 공연에서 상대 테너가 감기에 걸려 소리가 잘 안 나오니까 서덜랜드가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는... 훈훈한 에피소드다. 세상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지닌 소프라노가 피아니시시모로 노래하는 모습... 해설자도 아나운서도, 듣는 나도 취향의 벽을 넘어서 인간성에 감동을 받았다.
요즘은 서덜랜드가 좋아졌다. 성악을 공부하려고 유튜브를 헤엄치면서 새록새록 알게 되는 기쁨이다. 과거에는 정말 알기 힘들던 많은 주옥같은 정보들을 요즘 세상에서는 쉽게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 서덜랜드의 공연 동영상을 보면서 내가 싫어하던 크헉~하는 거창한 발성에 대한 거부감도 잊어버리고 빠져들었다.
내가 좀 너무 주류이면 안 쳐다보고 딴 데로 가버리는 반골 기질이 있다. 90년대에는 조수미를 안 좋아했었다;;(신영옥만 좋아했다.) 요즘은 안나 네트렙코를 안 좋아한다. 공부하기 전엔 몰랐는데 공부를 하다보니 음정 떨어지는게 너무 잘 들린다. (디아나 담라우만 좋아했는데 지금은 좀 달라지려고 한다. 담라우는 점점 쇠퇴하고 또 잘 하는 소프라노들이 일어나니까.)
암튼 고클에서 서덜랜드를 숭앙하는 것을 보며 완벽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다. 예전에 조안 서덜랜드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저 남의 이야기였던 것이, 이제 내가 늦은 나이에 성악을 공부하면서 과연 내 목소리의 전성기가 지나기 전에 내가 테크닉을 완성하고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시점이 되자 아주 처절하게 생각하게 된다. (아 이제 전성기 이미 꺾이는 나이가ㅜ)
테크닉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생각과 자아가 많이 필요하지만,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표현을 하기 위해선 자기를 비우고 버리는, 내어주는 과정이 많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혹은, 감정표현이라는 것도 테크닉처럼 목표를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하는 것일까.
(지금 생각으로는 테크닉이든 감정표현이든 훈련과정에서 채우는 과정과 비우는 과정의 적절한 매치가 이루어져야 발전이 있는 것 같다. 테크닉을 처음 얻을 때는 많이 생각해야 하지만 점차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경지에 이르면서 높은 자유도를 얻어 감정표현을 할 여유가 충분해지는 것이다. 테크닉 채움->비움->감정표현 채움->비움)
조안 서덜랜드는 전성기가 지나 지난 시절을 돌아보며 회한을 느꼈을까 아니면 현재의 충만함을 느꼈을까? 나는 굳이 회한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남들의 입장에서는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본인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미있게도 세월이 흐른 지금은 서덜랜드의 전성기는 감정표현 부족 꼬리표 떼고 레전드로 추앙받는다. 요즘 벨칸토 가수들이 옛날만 못해서 그런것 같다. 아니면 그때 그 해설가만 너무 깐깐한 것이거나, 전성기의 기준이 좀 달랐던 것 같다. 80년대 공연 영상물들이 지금도 인기가 있는데 말이다. 내가 듣기에는 목소리가 좀 나이든 티가 나서 예쁘지는 않지만 테크닉도 완벽하고 표현도 훌륭하고 연기도 그 시절 기준으로는 좋은 것이었다.
정말로 운이 없는 경우는 아예 성숙의 기회를 갖지 못한 안나 모포 같은 경우다. 안나 모포는 60, 70년대에 잠시 최정상에 올랐다가 너무나 빨리 목소리가 쇠퇴한 비운의 케이스다. 벨벳처럼 부드럽고 볼륨감있는 리치한 목소리에, 목소리만큼이나 너무나 아름답고 글래머러스한 미인이였다. 지금까지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소프라노 중에 안나 모포와 같이 목소리도 외모도 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사람이 없었다. 그 자태만 보면 도무지 할리우드 여배우가 아닌 성악가라고 상상할 수가 없는 극한 미모는 차라리 저주였다. 그 시절은 영상물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라 모포 같은 소프라노는 신이 내린 선물과도 같은 존재였고, 모든 것이 완벽한 모포가 너무 잘 나가니까 매니저 남편이 극한 공연일정을 밀어붙여서 목소리가 일찍 쇠했다.
나중에 남편탓이라고 이혼을 하고, 재혼을 하고서 재기를 노렸지만 이미 망가진 목소리가 돌아와주질 않았다. 그 시절을 본 사람들은 노래가 안 되는데 얼굴로 민다고 생각했겠지만, 원래 모포의 목소리는 너무나 아름다왔다. 단지, 좀더 깊고 풍부한 감정표현이 아쉬웠었는데, 그것이 나이가 들며 자연스레 그것이 채워질 수도 있었을텐데, 목소리가 너무 빨리 쇠해서 그 완성을 이루지 못 했던 것이다.
만약 그 많은 공연을 반복하지 않고 충분히 쉬면서 새로운 레파토리를 공부하고 스스로를 성찰하고 깊어지는 과정을 가질 수 있었다면, 깊은 표현을 수련할 수 있었다면... 아니 그냥 최소한이라도 쉬어서 그 목소리를 유지만 할 수 있었더래도... 성악가의 남편의 역할이 참으로 크게 보이는 순간이다.
서덜랜드의 남편인 지휘자 리처드 보닝은 바그너 가수가 되려던 서덜랜드를 설득해서 직접 훈련시키면서 벨칸토 가수로 성공시켰는데, 절대음감이 없는 것을 이용해서 고음훈련을 시킨 일화가 유명하다.
서덜랜드는 키가 크다. 180이나 된다. 주로 메조소프라노가 키가 크고 드라마틱이나 바그너 전문 소프라노도 키가 크다. 그래야 위풍당당한 소리가 나와준다. 아담한 체구의 소프라노가 콜로라투라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키가 작으면 성대가 짧고, 성대가 짧으면 높고 가벼운 소리가 난다. 키가 크면 성대도 길고, 성대가 길면 낮고 무거운 소리가 나는 것이다. 그런 자연적 경향에 거슬러서, 타고난 성대의 길이에 개의치 않고 고음으로 올라가는 것은 무조건 테크닉이다.
키만 큰게 아니라 성량도 엄청나서 선생들은 모두 바그너 오페라 가수가 되라고 권했지만, 그랬던 선생들은 성량을 늘리려 무리해서 전성기가 되자마자 은퇴해야 했다고 한다. 서덜랜드는 엄청난 성량에 고음, 초절기교의 테크닉 모두를 갖추고 최정상 오페라 가수로 오랫동안 활약했고 오페라 감독인 남편 외에도 루치아노 파파로티, 마릴린 혼이라는 좋은 파트너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외에도 자녀들도 낳아 키웠고, 은퇴한 후엔 개들을 키우며 한가롭게 살다가 돌아갔다. 행복한 소프라노였다고 생각한다.
1990년 은퇴한 후 남편인 보닝이 조수미의 프랑스 오페라 아리아 모음집 <Carnaval>을 1994년 녹음하자 이 음반을 보며 질투에 불타올랐다는 귀여운 일화가 있다. 이미 은퇴까지 한 몸임에도 나의 전성기때에도 못 해본 프랑스 초절기교 오페라 아리아를 녹음해버리다니, 하고 후배의 위업에 질투를 하는 노장의 욕심과 정열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조수미의 이 음반은 정말 명반이다. 아무나 할 수 없는 녹음이기도 하다. 극고음이 자유자재로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천의무봉 그 자체, 극치의 아름다움이다. 나도 그중에서 한 곡 불러보고 싶은 소망이 있다.
라미레미
2019.5.11.
(2024.3.10. 수정)
Joan Sutherland "Son vergin vezzosa" on The Ed Sullivan Show
https://www.youtube.com/watch?v=3JnFiESm7W8&a
Joan Sutherland & Marilyn Horne "Mira, o Norma" on The Ed Sullivan Show
Sumi Jo. Carnaval! - French Coloratura Arias (1994)
'음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일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 Künftger Zeiten eitler Kummer<독일가곡 9곡 Neun Deutsche Arien>-Händel 가사번역 (0) | 2024.06.22 |
---|---|
김연아. 피겨스케이팅 선수와 소프라노의 공통점 (0) | 2024.05.12 |
한숨, 눈물, 근심, 고난 Seufzer, Tränen, Kummer, Not - Bach 가사번역 (0) | 2024.03.02 |
어머니가 서계시네 Stabat Mater - Pergolesi 가사번역 (0) | 2024.02.24 |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Erbarme dich - Bach가사번역 (1) | 2024.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