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27일 금요일 예술의 전당에서 한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 제작의 노르마 공연을 다녀왔다. 약간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좋은 공연이었다. 오페라 직관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디비디로는 3개나 미리 공연을 본 셈이었는데, 로마 공화정 시대와 제정일치의 갈리아족의 이야기로만 보았을 때와 비교했을 때 이번처럼 현대의 의복, 현대의 종교, 현대의 부엌에서 진행되는 사랑과 종교, 개인과 민족의 갈등의 이야기는 그 충격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1막의 충격은 무대를 가득 채우며 무성한 십자가들이었다. 수없이 많은 십자가가 숲을 이루고 기괴하면서도 짓눌리는듯 무거우면서도 찌르는 듯한 압박감을 주었다. 나중에 2막의 무대 중앙의 원형의 십자가들은 마치 가시면류관을 연상시켰다. 드루이드 사제들이 입은 옷도 남녀 모두 카톨릭 내지는 기독교의 것과 유사했다. 단지 카톨릭은 남자만 사제가 되는데 드루이드교는 여자도 사제가 되고, 그 중에도 으뜸인 사제장은 노르마이며, 예지자이기도 하다. 속세의 권력-군권을 지닌 아버지 오르베소도 노르마의 허락이 없으면 전쟁을 일으키지 못한다.
성속일치, 제정일치 사회란 이런 것인가, 하는 깨달음이 있었다. 막연히 교과서에서 삼국시대 이전의 제정일치 사회를 배울 때는 몰랐던 느낌이다. 즉, 현대의 군복을 입고서 민족의 원수에게 복수하고, 로마의 압제에 대항하고자 하는 드루이드교도들과 막강한 종교의 지배는 요즘의 이스라엘과 싸우는 팔레스타인 민족과 미국과 싸우는 이슬람 원리주의를 떠올리게 했다.
그런데 옷은 기독교의 옷. 가장 ‘흔한’ 종교로서 등장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나에겐 ‘모든 종교가 뭐 다 그렇다’라는 메세지로 읽혔다. 실은 모든 종교가 그런 것은 아니고 서양의 종교, 즉 중동에서 발생한, 유대민족이 만든 종교에서 가지치기해 나온 형제종교들이 그렇다. 유대교, 카톨릭, 개신교, 그리스 정교회, 이슬람까지.
도올 김용옥 선생의 말씀대로 (하늘과 땅, 음양의 조화가 아니라) 하늘만 막강하고 땅은 영 무시하는, 아버지만 존재하고 어머니는 없는 종교들이다. 신을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로 표상하기 때문에 엄하고 무서운 하느님, 자녀들은 그의 분노와 변덕을 두려워해야 하는 하느님이 된 것이다. 예수님이 등장한 후 자애로운 하느님으로 많이 이동했지만, 카톨릭이 성모마리아를 숭배하면서 ‘구조적으로 없는 어머니’를 많이 보강하긴 했지만, 그렇다. 뿌리가 유대인의 신이라서 그렇다. 척박하고 메마른 땅에서 하늘만 바라보고 살아온 민족이 만들어낸 종교인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만을 절대적으로 섬기며 속세의 가부장까지 합쳐 너무나 타협을 모르는 남성적인 종교라서, 형제들끼리 조금 다른 것을 못 참고 죽기 살기로 싸우는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 기본 성향에 서로간에 전쟁과 압제, 착취, 복수의 역사가 이어지면서 지금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죽기로 싸우는 것 같다.
드루이드족은 대사제인 노르마가 대장군인 오르베소보다 더 쎄니까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큰 종교인걸까? 여신을 섬기는 드루이드족은 최소한 하느님 아버지를 섬기는 다른 가부장제보다는 나은걸까? 좀더 정상적인 것일까? 그러나 성속일치의 사회라는 것은 참으로 개인을 제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가 된 정결서약이라는 것도 진정 여성을 속박하는 것인데, 물론 왜 그런 것이 있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피임법이 발달하지 않은 옛날엔 괜히 하고 싶은 대로 사랑을 했다가는 애가 생기고, 애를 키우느라 종교적인 삶에 충실할 수가 없는 일이기에 실리적인 이유에서는 못하게 막아야할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규범은 자기가 애를 낳을 일이 없는 남성들에게는 그다지 큰 문제를 일으킬 일이 없다. 다만 여성에게만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규범이 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드루이드족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오는 과도기의 사회같아 보인다. 과거처럼 여전히 여자 사제가 여신을 섬기는 최고의 자리에 있지만, 전쟁을 하는 주체인 대장군 혹은 족장이 실질적인 왕이 되는 것이다.
1막 끝나고 관객들 얘기하는 소리를 들으니 십자가와 카톨릭 제복 같은 의상이 거북하다는 분들이 꽤 있나 보던데, 그 거북함을 어쩌면 연출가는 일부러 노린 것 같다. 만약에 자기가 카톨릭이나 여타 기독교 신자라면 자신이 믿는 종교를 떨어져서 비판적으로 보는 것이 마음 속으로 불편할 것 같다. 여주인공이나 여주의 라이벌 내지는 조력자 아달지사가 사제복을 입고 등장하는 것도 많은 이들에겐 불편할 것이다. 뭐 나같은 사람에겐 좀 신선하게 느껴졌지만.
원래 카톨릭은 가부장제의 종교라서 여자들에게 권력을 주지 않고, 그 이유로 사제도 남자만 되고 여자는 못 되는 것인데(요즘은 사제가 부족하기도 해서 여자도 뽑자는 얘기가 있다고 들었다. 이미 성공회는 여자도 사제가 된다.) 무슨 로마 공화정 시대의 ‘야만인들’인 드루이드족은 여자가 사제가 되고, 그것도 교황같은 대사제가 되고 사제 신분으로 사랑에 빠져 고뇌한다는 것이… 익숙한 세계에서 너무나 큰 거리로 점프한 이야기라 자기도 모르게 미식거리는 멀미증상을 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KKK단 같은 의상까지 등장해 ’나쁜 놈‘인가? 드루이드족은 우리편 아닌가? 헷갈리게 만드니 솔직히 참 혼란스러웠다. 나는 1막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나서야 정리가 되었다. KKK단의 고깔 모자를 뒤집어쓰고, 무릎꿇고 기도하는 단을 열을 맞추려 애쓰고, 아이들을 줄을 맞추려 애쓰는 종교는 (근본주의의 강박에 대해서는) ‘다 같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다 섞은 것 같았다.
그런데 진정한 충격은 2막의 노르마의 집이었다. 마치 광고에 나올 것 같은 안락한 최첨단 주방에서 헤드폰을 쓰고 티비를 보는 아이들, 그런데 그 속에 자기 자식을 칼로 찔러 죽이기 위해 커다란 비닐을 들고 등장한 노르마. 노르마는 시체처리를 위해 미리 비닐을 펴놓은 후 자기 자식을 안고 오지만, 결국 찌르지를 못한다.
정말 현실 속에 있을것 같기도 한 느낌이 언듯 들어 아득했다. 우리가 아는 현실 속에서는 흔히 경제적으로 절벽끝까지 몰린 부모들이 절망 속에 자식들을 데리고 ‘동반 자살’을 하지만, 단지 저 시대니까 저 상황이니까 도저히 남은 아이들이 민족의 배신자의 자녀로서 죽음보다 못한 비참한 취급을 받는 것을 견딜 수 없어 자기 손으로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려고 하는 것일 뿐이다. 정말이지, 많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 아팠다.
알렉스 오예의 연출 노트를 읽어보면 이번 노르마의 무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성찰하여 ‘오늘날의 종교, 오늘날의 군사주의, 오늘날의 정치 엘리트를 반영한 강력한 무대 이미지’로 변환하는 시도를 했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노르마는 ‘통제받는 딸, 배신당한 연인, 절망에 빠진 어머니’로서 제정일치 ‘사회의 강력한 규범 속에 짓눌리는 여성’, ‘개인적 상황, 사회적 제약, 관습’의 갈등으로 인해 ‘희생양’이 된 여성이다.
처음에 1막을 보다가 놀란 대목이 노르마가 폴리오네와 함께 로마로 갈 꿈을 꾸고 있는 것. 그런데 이 남자가 가자는 말을 안 하네, 고민하고 전전긍긍하는 노르마. 노르마도 처음엔 민족을 배신하고 그저 사랑을 따라 갈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비극의 여주인공으로서 죽을 작정으로 사랑을 하고 애를 낳아 키운 것은 아니다.
그렇다. 노르마가 최고권력을 지닌 대사제라는 이유로, 비극의 여주인공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정해진 줄거리 대로’ 노르마가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결말에 익숙하다. 그러나 노르마는 죽고 싶지 않았다. 자기 민족과 종교가 요구하는 규범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사랑에 빠진 자로서 사랑하고, 아이기 생기자 아이를 낳고, 결국 권태기에 들어선 남자에 의해 버림받으며 어느쪽을 택해도 다른 한 쪽을 버려야 하는 갈등과 고뇌 속에서 어디에서도 자기가 설 곳을 발견하지 못하고 파멸해간 것일 뿐이다. 만약에 좀더 냉정한 사람이었다면 자기를 저버린 폴리오네를 죽이고 입싹닦을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를 못한 것이다.(남자가 배신하자 새신부도 애들도 다 죽여버리는 여자도 있다. 바로 노르마와 더불어 마리아 칼라스와 뗄 수 없는 이름의 오페라 <메데아>의 메데이아다.)
만약에 노르마가 대사제가 아니라 평범한 한 드루이드족 여인이었거나 아니면 평사제였다면, 축복받지 못할 자기 사랑의 결실로서 아기가 생겼을 때, 도저히 살아날 방법을 찾지 못한채 아마도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까? 사실 이건 가부장제가 인류 문명을 지배하게 된후 지금까지 어느 나라에서나 일어났고 일어나는 있는 일이다. 단지 노르마는 임신도 아이도 숨길 권력과 재력이 되는 대사제였기 때문에 아이들을 키우고, 몇년씩이나 폴리오네와 불안정한 사랑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 공연의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것을 밝히고 서로 화해한 노르마와 폴리오네는 멋진 비극의 주인공처럼 불타는 화형대로 품위있게 걸어나가지 않았다. 그 대신 모든 결론이 난 후 팔을 뒤로 묶인 폴리오네는 병사들에 의해 끌려가고, 제 발로 화형대를 향해 가는 노르마를 마지막으로 포옹하던 아버지 오르베소가 갑자기 노르마를 총으로 죽이면서 극이 끝난다.
좀 충격이었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화해와 용서의 장면을 멋드러지게 마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뜬금없는 딱총소리로 갑자기 끝내버렸을 때, 어떤 균열이 생겼다. 그래서 진실로, 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노르마가 자신의 부정과 그 대상이 적장이라는 사실을 밝혔을 때, 그리고 아이까지 있다고 보여주었을 때(그 말이 진실임을 쐐기로 박은 셈이다) 아버지 오르베소는 노르마가 자기 말을 부정하고 다시 주워담기를 원했다. 어떻게든 딸을 살리고 싶어했다. 아이들을 부탁하는 딸에게서 그가 진정 죽음을 택하였다는 것을 납득한 후, 오르베소는 최소한 자기 스스로 딸의 목숨을 끊어 화형의 고통은 겪지 않게 해주려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오르베소는 자기 민족에 대한 책임과 자기 종교에 대한 충성에도 불구하고 노르마를 용서하고 품고 싶어했다. 그러나 민중은 달랐다. 사실이 밝혀지고, 눈물로 화해와 용서가 일어나는 대목에서도 합창단은 ‘끔찍하여라…’를 외고 있다. 그들은 용서할 수가 없다. 자기의 가족을 죽인 로마인과 내통한 여자를, 우리의 삶을 끔찍하게 파괴하고 우리를 인간 이하의 야만인으로 취급하는 로마인과 내통한 지도자를. 그나마 노르마의 자백과 정직함으로, 오르베소의 용서와 스스로 맺음(명예살인)으로 넘어가주는 것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의 충격으로 얼어버린 와중에.
만약에 두 민족이 섞여사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인 사이에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사랑하는 커플이 생기고 갈등이 생겼을 때, 그들은 과연 몬태규와 캐퓰렛 가문처럼 화해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죄없는 젊은이들의 죽음 앞에서 겨우 화해하는 몬태규와 캐퓰렛 가문은 자기 자식들의 죽음 앞에 깊이 뉘우친 그 가주들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기에 화해가 가능했을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원수로, 복수로 얽힌 이 두 민족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일일것 같다.
그러게 화해무드가 조성되었을 때 잘 되었어야 했는데, 이스라엘에선 온건파인 좌파총리가 어느 정도 진행시키면 우파가 득세해서 다시 압박과 분쟁으로 가고, 팔레스타인에서도 잔인하게 당하는 만큼 온건파보다는 극단주의가 점점 득세하면서 겉잡을 수 없이 나빠지기만 한 결과가 지금의 전쟁이다.
(안타깝지만 인간의 본성이 그렇구나 하고 강건너 불구경할 일은 아니다. 왠지 패턴이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는가? 지금까지 진행되어 왔고, 어쩌면 우리에게 닥쳐올 지도 모르는 미래이다.)
징을 울려 전쟁을 소집할 때도, 폴리오네에게 아달지사를 화형대로 보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때도, 어쩌면 아직 노르마는 자기가 죽을 것을 결정하지 못 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끗하게 죽으려는 자기에게 희망을 줘 놓고는 폴리오네를 설득하지 못하고 맥없이 돌아온 아달지사에게 분노와 의심, 배반당했을 거라는 절망감이 치솟으며 그 순간 아달지사를 죽여버려야지 하는 생각을 실제로 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의심도 들었다.
결국 노르마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죽을 것을 택했다. 그러나 만약에 민족이 용서할 수 있었다면,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로마가 변하지 않는데 드루이드족이 혼자 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민중이 변하지 않는데 오르베소 혼자 다른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문제의 남자 폴리오네가 노르마에 대한 정절을 지켰더라면, 노르마는 그와 함께 로마로 떠나고, 민족에게는 배신자로 남고, 배신당한 아버지 오르베소는 한평생의 한을 갖고서 드루이드족과 함께 폴리오네 대신 새로온 총독과 로마군을 상대로 싸움을 이어갔을 것이다. 모든 것은 달라지지 않은 채로, 노르마 혼자선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안온한 개인의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노르마는 순전히 사회적 자아로서만 살아갈 수 없어서 사랑에 빠졌고, 순전히 개인으로서만 존재할 수 없어서 죽음을 택했다. 사회적 자아와 개인이 다툴 일 없이 원만히 조화시킬 수 있는 삶, 이것을 왜, 누가, 이 여성에게 허락하지 않았는가? 오늘을 사는 여성들에게도 굉장히 익숙한 질문이다.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공연이었고, 좋았다. 무대와 의상, 연출만이 아니라 로베르토 아바도 감독과 국립 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연주도 좋았고 노이 오페라 코러스 합창단도 좋았다.
아쉬웠던 점은 가장 중요한 노르마 역의 데시레 랑카토레가 아마 컨디션이 안 좋았었는지 음량도 작고 고음도 잘 안 나오는 등 시원치 않은 기량을 보였던 것이다. 1막에서 합창단과 함께 거하게 나와줘야 하는 대목에선 좀 약하다는 느낌이, 처음엔 잘 몰랐는데 아달지사가 나오고 나니까 아 맞다, 저렇게 좍좍 뽑아줘야 되는데 왜 이렇게 약했나 싶었다. 정결한 여신을 부를 때 높은 이동식 계단으로 올라가서 부르는데, 그만큼 웅장하게 소리가 나와 주지 않으니까 그 높은 데서 노래하는게 좀 불안하게 보이기도 했다. 실은 테너도 처음 등장해서 고음 갈 때 좀 삐그덕거려서 가뜩이나 비호감 캐릭턴데 좀 분위기가 안 잡혔었다.
그래도 20년을 기다린 공연이라 기대를 놓지 않고 계속 보다보니 역시 훌륭했고 결국 2막의 노르마와 아달지사의 이중창 '보세요, 노르마'(Mira o Norma)에서는 나의 눈물을 쏙 빼놓았다. 먼옛날 몇천년 전 로마에 항거하던 무슨무슨 족의 여자 사제들의 생소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벌어질 수 있는 고뇌와 고통, 위로와 희망의 이야기로 다가왔다. 그리고 물론, 마지막의 노르마와 폴리오네의 이중창 '당신이 어떤 마음을 배신했는지 아나'(Qual cor tradisti)에서도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벨리니의 음악은 어디 하나 빠질 것이 없이 완벽했고 극의 진행도 어디 하나 어거지가 없이 완벽하게 짜여진, 정말 걸작이었다. 다만 공연 진행 중 Mira o Norma가 끝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전환이 너무 갑자기 되어 그건 좀 아쉬웠다. 그리고 랑카토레는 가끔 이번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으려나 우려되는 긴장감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Mira o Norma의 안타까운 고음 빼고는 그래도 무사히 배역을 수행했고, 폴리오네역의 이라클리 카히제와 아달지사역의 김정미, 오르베소역의 송일도는 훌륭하게 배역을 소화했다. 특히 나는 메조소프라노 김정미가 노래할 때마다 좍좍 뻗어나가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짙고 풍성한 소리에 너무 좋았다. 메조소프라노가 이렇게 좋다니, 새로운 발견이었다.
자막번역은 무난한 편이었고 노르마가 아달지사에게 말하는 말투가 자연스러운 것은 좋았는데, 자기 백성들 앞에서 또 폴리오네에게 나 아닌 ‘저’라고 지칭하는 부분은 좀 어색하다고 생각한다. 노르마의 성격에 안 맞는다. 그리고 내가 안 공부한 부분은 모르겠으나 내가 노래하기 위해 공부한 부분을 봤을 때는 번역이 정확하지 않고 어물쩡 넘어가는 부분이 간혹 있어서 아쉬웠다.
데시레 랑카토레의 예전 노르마 공연을 보며 남은 아쉬움을 달래본다.
라 미레미 씀
Desirée Rancatore(이탈리아, 1977- )
Ah! di qual sei tu vittima Norma Teatro Carlo Fel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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